뜨거운 사막에 도시를 짓던 30년, 그의 다음 현장이 보이지 않는 이유

사막과 해외 현장을 누빈 EPC 전문가 홍 상무. 30년 경력이 이력서 몇 줄로 줄어드는 순간, 다음 일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 스펙보다 경험을 설명하는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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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사막에 도시를 짓던 30년, 그의 다음 현장이 보이지 않는 이유
사막의 대형 플랜트 건설 현장을 바라보며 안전모를 든 중년 EPC 전문가의 뒷모습. AI 생성 이미지

말로 꺼내지 못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홍 상무는 지난 30년 동안 중동의 사막과 동남아시아의 현장을 오갔다.

국내 건설사에서 설계, 조달, 시공이 맞물린 대형 EPC 프로젝트를 맡았다. 공정이 밀리면 원인을 찾았고, 현장과 본사의 판단이 엇갈리면 사람들을 한자리에 앉혔다. 낯선 나라에서 협력사와 일했고, 예상하지 못한 변수 앞에서 다음 결정을 내려야 했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현장에서, 홍 상무는 늘 ‘이 일이 어디서 막혔는가’를 먼저 보던 사람이었다.

정년을 앞둔 지금, 그에게는 다른 질문이 남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홍 상무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EPC 프로젝트를 오래 했다고 말할 수는 있다. 현장을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30년이 회사 밖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험인지, 누구에게 어떤 역할로 설명해야 하는지는 선명하지 않다.

회사 안에서는 너무 당연했던 일들

회사 안에 있을 때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누가 무엇을 잘하는지 서로 알았다. 공정이 흔들릴 때 누구에게 먼저 전화해야 하는지도 정해져 있었다. 견적서의 숫자만 봐도 이상한 지점을 짚어내는 사람, 현장소장의 말 속에서 진짜 문제를 알아듣는 사람, 발주처와 협력사 사이에서 끝까지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홍 상무도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사를 나와 이력서를 쓰는 순간, 그 긴 시간은 몇 줄로 줄어든다.

해외 플랜트 프로젝트 관리

설계·조달·시공 총괄

현장 운영 및 대외 협력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이 말만으로는 홍 상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렵다.

이력서에 빠진 것은 이런 장면들이다. 프로젝트가 늦어졌을 때 어느 문제부터 풀었는지,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어떻게 결정을 만들었는지, 계획에 없던 변수가 생겼을 때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켰는지. 다음 일을 함께할 사람이 알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이야기다.

경력이 많아서 오히려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

경력이 길수록 경험은 몸에 밴다. 너무 익숙해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정도는 다 하는 것 아닌가요?”

오래 일한 사람에게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그 ‘그 정도’가 사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공정 지연을 해결한다는 말은 간단하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일정표만 다시 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급이 늦어진 이유를 확인해야 하고, 설계 변경이 어떤 공정에 영향을 주는지 따져야 하며, 협력사와 발주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를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는 그 모든 정보를 모아 지금 내려야 할 결정을 정리해야 한다.

홍 상무는 바로 이런 일을 해왔다. 복잡한 현장에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사람들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다음 역할도 달리 보인다.

프로젝트 관리 경험은 단순히 과거의 직무가 아니다. 해외 사업의 리스크를 검토하는 역할이 될 수도 있고, 새로 진입하는 기업의 현장 운영을 돕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후배 관리자에게 실제 상황에서의 판단 기준을 전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런 가능성은 경력을 ‘몇 년 일했는가’가 아니라 ‘무슨 문제를 어떻게 풀어왔는가’로 읽을 때 보인다.

이력서 한 장을 고치기 전에 해야 할 일

다음 일을 찾기 시작하면 보통 이력서부터 손본다. 최근 채용공고를 보고, 필요한 자격증을 찾고, 익숙하지 않은 도구를 배우려 한다.

모두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직함이 아니라 장면을 다시 꺼내보는 일이다.

어떤 일이 가장 어려웠는지. 그 상황에서 내게 맡겨진 역할은 어디까지였는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했기에 달라진 일은 무엇이었는지. 지금 다시 같은 일이 생긴다면 나는 무엇부터 살필지.

이 질문에 답하다 보면 이력서에 적는 말도 달라진다.

‘현장 관리’는 ‘계획과 실제 사이의 틈을 찾아 프로젝트가 멈추지 않게 한 경험’이 된다. ‘고객 상담’은 ‘고객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를 듣고, 필요한 선택지를 정리해온 경험’이 될 수 있다. ‘조직 운영’도 ‘사람마다 다른 일을 하던 팀에 공통의 기준을 만들고 결과를 낸 경험’으로 다시 보인다.

과장해서 꾸미는 일이 아니다. 이미 해온 일을 제자리에서 꺼내보는 일이다.

다음 현장은 아직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새로운 도구를 배우고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더하기 전에, 이미 가진 경험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 배우는 것도 어디에 쓰일지 보인다.

홍 상무에게 필요한 것은 ‘30년 경력자’라는 명함을 더 크게 내미는 일이 아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지, 어떤 문제 앞에서 자신의 경험이 살아나는지, 앞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싶은지를 스스로 설명할 언어가 필요하다.

NEXTAGE는 바로 그 경험을 다시 정리하는 데서 시작하려 한다. 이력서를 보기 좋게 다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떤 문제 속에서 어떤 판단을 했고 무엇을 바꿨는지 다시 꺼내보는 일이다.

이 작업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음 일을 찾는 당사자에게도 필요하다. 내가 어디에서 힘을 발휘하는 사람인지 알아야, 낯선 기회 앞에서도 나에게 맞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 다음 현장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동안 해온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랫동안 너무 당연하게 해온 일을, 이제는 다음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꺼내야 할 때가 왔을 뿐이다.


이 글 속 홍 상무는 여러 EPC 전문가가 은퇴 전후에 마주할 수 있는 고민을 바탕으로 만든 가상 인물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기업이 경력 많은 사람을 찾으면서도, 정작 프로젝트를 맡길 사람을 찾기 어려워하는 이유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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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XT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