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사라지는 건 일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던 말입니다

오래 일했는데도 퇴직 후 “나는 뭘 잘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집니다. 어쩌면 사라진 것은 일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던 언어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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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사라지는 건 일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던 말입니다

퇴직하고 나면
의외의 순간에 말문이 막힙니다.

누군가 이렇게 물을 때입니다.

“전에 어떤 일 하셨어요?”

20년, 30년을 일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대답은 이상할 만큼 짧아집니다.

“관리 쪽에 있었습니다.”

“영업도 좀 했고요.”

“지점장을 했습니다.”

“이것저것 했죠.”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말을 하고 나면 어딘가 허전합니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명함 몇 글자 안으로 너무 쉽게 줄어든 것 같아서요.

퇴직하면서 사라지는 것은
월요일 아침 출근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랫동안 나를 설명해주던
말도 함께 사라집니다.


회사에 있을 때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사 이름이 있었고,
부서가 있었고,
직함이 있었습니다.

“○○회사 부장입니다.”

“△△지점 지점장입니다.”

그 한마디면
상대는 대략 나를 이해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책임을 맡고 있는지,
어떤 조직에 속해 있는지까지요.

회사라는 이름이
나를 대신 설명해준 셈입니다.

그런데 퇴직하는 순간
그 설명이 갑자기 사라집니다.

그때 처음 질문이 돌아옵니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이지?”

생각보다 쉬운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경력을 직함으로 기억해왔습니다

30년 동안 실제로 한 일을 떠올려보면
직함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습니다.

엉킨 일을 정리했고,
화난 고객을 달랬고,
사람 사이의 갈등을 풀었고,
숫자가 이상하면 다시 들여다봤고,
후배가 실수하지 않도록 미리 알려줬습니다.

보고서 한 장을 만들기 위해
여러 부서의 말을 맞춘 적도 있을 겁니다.

위에서는 빨리 하라고 하고
현장에서는 어렵다고 할 때,
그 사이에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낸 적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을
대단한 능력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냥 ‘회사 생활’이라고 불렀습니다.

너무 오래 해왔기 때문입니다.

잘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잘하는 일은 오히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다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모두가 잘했던 일이라면
왜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늘 특정한 사람을 찾았을까요.

“이건 이 부장한테 물어봐.”

“이 문제는 김 팀장이 잘 알아.”

“저 사람한테 맡기면 정리가 돼.”

그 말 속에
이미 답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경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퇴직하면 직함은 끝납니다.

하지만 직함 안에서 쌓인 능력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부를 말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지점장 10년’이라고 말하면
과거의 자리만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조금 달라집니다.

“사람, 자금, 고객, 리스크가 동시에 움직이는 현장에서
우선순위를 판단하고 조직을 운영해왔습니다.”

‘영업 지원을 오래 했다’는 말도

“고객의 요구와 현장의 상황을 정리해
의사결정이 빨라지도록 조율해왔습니다.”

라고 바꿔볼 수 있습니다.

없던 능력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있던 경험에 이름을 붙이는 일입니다.

NEXTAGE가 ‘경험 자산화’를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경험이 자산이 되려면
오래 일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을 보았고,
어떤 문제를 해결했고,
무엇을 판단했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꺼낼 수 있어야 합니다.


AI 시대에는 오히려 이 일이 중요해집니다

AI가 많은 일을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자꾸 새로운 기술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A세대에게
새로운 기술만큼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발견하는 일입니다.

AI는 문서를 만들 수 있고,
자료를 정리할 수 있고,
정보를 빠르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30년 동안 현장에서
왜 어떤 순간에 멈췄는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이건 문제가 생기겠다’고 느꼈는지,

수많은 선택 가운데
왜 하나를 골랐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 안에는 경험이 있습니다.

실패도 있고,
관계도 있고,
책임도 있고,
시간을 지나며 생긴 판단 기준도 있습니다.

AI 시대에 경험이 쓸모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을 바꿔보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셨어요?”

대신,

“사람들이 당신을 언제 찾았습니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당신에게 가져왔습니까?”

“남들은 어려워했는데 당신에게는 익숙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몇 번 실패한 뒤에야 알게 된 것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시작하면
이력서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타납니다.

직함 아래 숨어 있던
나만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일을 찾는 데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꼭 다시 큰 조직에 들어가는 것만이
다음 일은 아닐 겁니다.

작은 회사의 문제를 도울 수도 있고,
후배에게 경험을 전할 수도 있고,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도 있고,
오랫동안 알고 있던 것을 글과 콘텐츠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일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데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나를
다른 언어로 설명하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회사 이름을 빼고 나면

오늘 한 가지 질문을 남겨봅니다.

회사 이름과 직함을 모두 지운 뒤에도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바로 답하기 어렵다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연습보다
맡은 일을 해내는 연습을 더 많이 해왔으니까요.

그러니 이제부터 해보면 됩니다.

기억을 하나씩 꺼내고,
반복했던 일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내가 어떤 문제를 해결해왔는지 찾아보는 것.

AI에게 도움을 받아도 좋습니다.

다만 마지막 문장은
내가 써야 합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해온 사람입니다.”

퇴직 뒤 필요한 것은
새로운 명함 한 장보다

어쩌면
그 말을 다시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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